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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평 공산당-중국공산당에 대한 9가지 논평

닉네임
임성준
등록일
2005-11-21 19:19:10
조회수
3963
9평 공산당-중국 공산당에 대한 9가지 논평

9평 공산당-중국 공산당에 대한 9가지 논평

『공산당에 대한 9개 평론』

대기원편집부


【 공 고 】『공산당에 대한 9개 평론』연재를 시작하며

‘9평 공산당’은 중국공산당의 본질을 9가지로 나눠 평론한 대기원시보의 사설입니다.
대기원시보는 인성, 인권, 자유를 지향하는 국제적인 신문그룹으로서(29개국 41개 가맹사), 동양의 정통정신문화를 발양하여 서구물질문명의 폐해와 반인류적인 인권문제를 개선하고 도덕성을 회복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대기원시보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인류문명을 선도해 온 찬란한 정신문화를 핍박하고 그 정통성을 멸절하려는 중국공산당의 본질과 지난 80여 년간 주기적으로 자행한 인권말살의 실상을 폭로하고자 합니다. 이는 인류의 안녕을 위협하는 삿된 독소를 제거하고 문화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대기원시보의 기본활동입니다.



구소련과 동유럽의 여러 공산당 정권이 무너진 지 10여 년이 지난 오늘 세계 공산주의 운동은 이미 전 세계 사람들에게 역겨운 존재일 뿐이며 중국공산당이 무덤 속으로 들어갈 시기 또한 단지 시간문제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공(中共)은 철저하게 무너지기 전에 오히려 극력 자신의 운명과 5천년 문명역사를 갖고 있는 중화(中華)대지를 함께 묶어놓고 있는데 이는 중국 민족의 큰 불행이다. 어떻게 공산당을 바라볼 것이고 어떻게 공산당이 없는 과도사회로 넘어갈 것이며 어떻게 중국 민족의 뿌리를 계속 이어갈 것인가 하는 것은 이미 구체적인 문제로서 중국 인민들 앞에 가로놓여 있다.

대기원시보는 이번 호부터 특별평론문 『공산당에 대한 9개 평론』을 발표하여 한 세기가 넘도록 인간세상에 재앙을 가져다 준 국제공산주의 운동, 특히 중국공산당에 대하여 사형선고와 같은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80여 년에 이르는 중국공산당의 역사를 훑어보면 어디에서나 끊임없는 거짓말, 전란, 기아, 독재, 도살과 공포로 얼룩져 있다. 중국 공산당은 중국의 전통적인 신앙과 가치관을 무너뜨렸고 원래 중국인들이 갖고 있었던 고아한 윤리 관념과 사회체계도 와해시켜 버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살핌과 사랑, 그리고 조화로운 협조 등은 투쟁과 증오로 변질되었고 천지(天地)와 자연에 대한 존경, 두려움과 아끼는 마음은 천지(天地)와 '싸우는' 미친 듯한 광기로 변하였다. 이에 기인한 사회도덕체계와 생태계의 전면적인 붕괴는 중화민족뿐만 아니라, 나아가 전체 인류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 일체 재난은 모두 공산당의 정밀한 획책, 조직과 통제 하에 발생하였다.

“어쩔 수 없이 꽃은 지고 만다네.”라는 말처럼 현재 겨우 잔명(殘命)을 유지하고 있는 공산정권은 이미 말년에 도달하였으며 그것의 붕괴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것이 철저하게 멸망하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전면적인 사고를 할 필요가 있으며 고금중외(古今中外)의 모든 사악을 구비한 이 최대의 사교(邪敎)조직을 폭로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전히 공산정권의 기만 하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악독하기 그지없는 그것의 본질을 똑똑히 볼 수 있게 하여 공산당의 정신적인 독소를 씻어내고 심리적으로 공산당의 사악한 영혼 통제에서 벗어나며 공포의 쇠사슬을 끊고 나와 공산당에 대한 일체 환상을 포기하도록 해야 한다.

중국 공산당의 통치는 중국역사상 가장 어둡고 황당한 한 페이지이다. 또한 장쩌민이 발동한 '진선인(眞善忍)'에 대한 탄압은 가장 사악하였다. 이런 만행은 중공이 들어갈 관에 최후의 못을 박아 놓은 셈이다. 이 한 단계 역사를 뒤돌아보는 것은 이러한 비극이 영원히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동시에 우리 매 개인 역시 이로부터 자신의 내면세계를 되돌아보며 마땅히 발생하지 말았어야 할 매우 많은 비극들이 오히려 우리의 나약함과 타협을 틈타 이루어지지 않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연재 글의 차례

첫째 : 공산당이란 무엇인가
둘째 : 중국공산당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셋째 : 중국공산당의 폭력정치
넷째 : 공산당은 우주를 반대하는 힘이다
다섯째 : 장쩌민과 중공이 서로 이용하여 파룬궁을 박해한 사실
여섯째 : 중국공산당은 민족문화를 파괴하였다
일곱째 : 공산당의 역사는 살인의 역사였다
여덟째 : 공산당의 사교 본질
아홉째 : 중국공산당의 깡패본성

2004년 11월 18일

대기원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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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9ping.org



9평 중 첫째】공산당이란 무엇인가



5천 년간 중화민족은 황하와 장강(長江)이 육성한 대지에서 생활하면서 수십 개 조대(朝代)를 이어왔으며 찬란한 문명을 창조하였다. 그 기간 중에 희로애락, 흥망성쇠, 파란만장, 그리고 심금(心琴)을 울리는 감동이 있었다.

1840년은 역사학계에서 인정하는 중국 근대사의 시작인 동시에 중국이 중세에서 현대로 가는 기점이기도 하다. 그때부터 시작하여 중국 문명은 대략 4차례의 큰 도전을 거쳤다. 앞의 세 차례 도전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1860년 영불(英佛) 연합군의 베이징 공격, 1894년 중일(中日)전쟁과 1906년 중국 동북지방에서 발생한 러일전쟁으로 형성된 도전이었다. 한편 중국은 이런 도전에 대하여 서양문화를 끌어들이고(양무운동), 제도를 개량하였으며(무술변법)과 대청입헌, 이후 신해혁명을 일으키는 등으로 반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 승리국 중 하나인 중국의 이익은 열강들이 삼켜버렸다. 당시에 수많은 중국인들은 앞의 세 반응이 모두 실패하였다고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5.4운동이 나타났고 이로부터 네 번째의 파동이 일어났는데 또한 최후의 반응이기도 했다. 이를 통해 중국에서는 문화적으로 전면적인 서양화가 진행되었고 뒤이어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극단적인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 글에서 주목하는 것은 중국 최후의 파동에 대한 반응의 결과물인 공산주의 운동과 공산당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160여 년간 1억에 가까운 사람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하고 거의 모든 중국의 전통문화와 문명을 대가로 치른 것에 대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또한 중국이 선택한 것 혹은 외부에서 중국에 강제로 주입한 것이 어떠했는가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폭력테러로 정권을 탈취하고 정권을 유지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견해와 의도를 감추는 것을 경멸받을 일로 여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현존하는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결말은 이와 같다. 폭력은 공산당이 정권을 탈취한 수단이자 또 가장 주요한 수단이었다. 이것은 공산당이 탄생하던 그날부터 결정된 첫 번째 유전자였다.

세계적으로 최초의 공산당은 사실상 마르크스가 죽은 후 여러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나타났다. 1917년 10월혁명 이듬해, 소련 공산당이 정식으로 탄생하였다. 이 공산당은 ‘계급의 적들’에게 폭력을 실행하는 과정 중에 생겨났으며 동시에 자기편 사람들(즉 반역자)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는 가운데서 생존을 유지하였다. 소련 공산당은 내부 숙청 중에서 2천여만 명을 간첩, 반역자 및 의견이 다른 사람으로 몰아 학살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성립은 바로 소련 공산당이 통제하는 제3공산주의 인터내셔널(The Third Communist International)의 한 지부였으며 자연히 이런 폭력 전통을 계승하였다. 1927년부터 1936년에 이르는 이른바 첫 번째 국공(國共) 내전시기에 장시(江西)성의 인구가 2천여만에서 천여만으로 줄었으니 공산당 폭력의 심각한 재난을 가히 상상할 수 있다.

만약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전쟁과정에서 폭력이 불가항력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공산당처럼 이렇게 평화적인 시기에도 여전히 폭력 정치를 사용하는 정권은 세계에 둘도 없을 것이다. 중국이 공산화 된 1949년 이후 중국 공산당의 폭력에 상해(傷害)를 입은 중국인들의 숫자는 놀랍게도 그 이전 30년의 전쟁시기를 훨씬 능가한다.

중국 공산당이 폭력을 사용한 가장 좋은 예는 중공이 전력을 다해 지원한 캄보디아 크메르루주(Khmer Rouge)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정권을 탈취한 후 전 인구의 4분의 1을 학살하였다. 여기에는 대다수의 화교들이 포함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공은 지금까지도 크메르루주에 대한 국제사회의 공개적인 심판을 가로막고 있는데, 그들의 목적은 당연히 중국 공산당이 그 가운데서 일으킨 작용과 그들이 담당한 악랄한 역할을 계속 은폐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세계적으로 가장 잔혹한 무장단체와 정권들은 모두 중국 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를 제외하고도 인도네시아 공산당, 필리핀 공산당, 말레이시아 공산당, 월남 공산당, 미얀마 공산당, 라오스 공산당, 네팔 공산당 등등이 있으며 이들 역시 중국 공산당의 지지하에 건립된 것이다. 이들 당의 두목 중 많은 자들은 모두 중국인이며 어떤 자들은 지금도 여전히 중국에 숨어있다.

아울러 세계적으로 마오쩌둥주의를 종지로 하는 공산당에는 남미의 광명대도(Shining Path), 일본의 적군파가 있으며 이들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행동 역시 모두 세상 사람들이 혐오하는 대상이다.

공산주의 이론 근거 중 하나는 진화론(進化論)이다. 공산당은 종의 경쟁을 사회진화 중의 계급투쟁으로 발전시켰으며, 계급투쟁이야말로 사회발전과 진보의 유일한 원동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투쟁은 공산당이 정권을 획득하고 생존을 유지하는 주요한 ‘신앙’이다. “8억 인구가 있는데 투쟁하지 않으면 되겠는가?”라는 마오쩌둥의 유명한 말은 바로 이런 생존논리의 표현이다.

이 표현과 마찬가지로 유명한 것이 바로 마오쩌둥의 다른 한 마디 말이다. 즉, 문화대혁명을 “7~8년마다 한번씩 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폭력사용을 반복하는 것은 공산당 정권이 통치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폭력의 목적은 바로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매번의 투쟁운동은 모두 공산당의 한 차례 테러훈련이었으며 인민들이 내심으로부터 공포에 떨며 굴복하도록 하였고 이로부터 테러의 노예로 만들었다.

오늘날, 테러리즘은 문명과 자유세계에 대한 최대의 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공산당의 테러리즘은 국가를 매개체로 하였기에 규모가 더욱 거대하고 지속시간도 길며 끼친 재앙은 더욱 잔혹하였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 우리는 공산당의 이 유전적인 요소가 적당한 시기가 되면 반드시 공산당의 미래에 결정적인 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거짓말을 폭력의 윤활제로

인류 문명을 가늠하는 지표 하나는 제도 중에서 발생되는 폭력 작용의 비례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공산정권 사회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인류 문명의 한 차례 큰 퇴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진보적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이런 사람들은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이런 종류의 사회 진보에 반드시 필요하며 또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인식한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미국이 특별히 친근한 나라라고 느꼈다. 이는 단지 미국이 중국의 토지를 강제로 점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하여 침략적인 전쟁을 발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더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중국인은 미국에 대하여 호감을 갖고 있는데 이는 미국 국민성에서 풍기는 민주적인 풍격과 넓은 흉금 때문이다.”

이글은 중공 중앙의 기관지인 『신화(新華)일보』가 1947년 7월 4일 발표한 논평이다. 하지만 불과 3년도 안되어 중국은 북한에 군대를 파견하여 미국과 전쟁을 치렀으며 또한 미국인을 세계에서 가장 사악한 제국주의자로 묘사하였다. 중국대륙에서 온 사람이 50여년 전의 이 논평을 본다면 모두 깜짝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 공산당은 이와 유사한 문장을 어떤 식으로든지 새로 출판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은 정치권력을 잡은 후 숙반(肅反, 역주:반동분자 숙청), 공사(公私)합영, 반우파 투쟁, 문화대혁명, 6.4학생운동(역주:천안문 민주화 운동), 파룬궁 탄압 등에 매번 동일한 수단을 채용하였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57년에 중국 공산당이 지식인들에게 공산당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라고 해놓고 그에 따라서 ‘우파’를 체포한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음모라고 지적했을 때 마오쩌둥은 공개적으로 “그것은 음모가 아니라 ‘양모(陽謀)’다.”라고 말했다.

거짓과 기만은 공산당이 권력을 탈취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예로부터 중국 지식인들의 가장 중요한 믿음 중 하나는 바로 역사이다. 중국은 세계적으로 역사가 가장 길고 완전한 나라이다. 중국인들은 역사에 근거하여 현실을 판단하고 심지어 이 가운데서 개인의 정신적인 승화를 얻는다. 그러므로 역사를 속이고 뜯어 고치는 것 역시 중국 공산당의 중요한 통치수단이 되었다. 일찍이 춘추전국시대부터 최근에는 문화대혁명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으로 속이고 뜯어 고치고 거짓 논술을 펼쳤는데 50여년 동안 한번도 중단한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본래 모습을 되돌리려는 시도는 모두 무자비하게 봉쇄당했다.

은폐하고 덮어 감출 필요가 있을 때, 폭력으로 이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공산당은 기만과 거짓을 사용한다. 거짓은 폭력의 다른 한 면인 동시에 폭력의 윤활제인 셈이다.

이는 결코 공산당이 발명하고 창조한 것이 아니며 공산당은 단지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불한당과 같은 행실에 아름다운 가면을 씌워 사용했을 뿐이다. 중국 공산당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주기로 약속했고, 노동자들에게는 공장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지식인들에게는 자유와 민주, 평화를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지금 어느하나도 실현된 것이 없다. 한 세대의 기만당한 중국인들이 세상을 떠났으며 다른 한 세대의 중국인들은 계속해서 거짓말에 속고 있다. 이는 중국인들의 가장 큰 비애이자 중화 민족의 큰 불행이다.


끊임없이 바뀌는 입장과 원칙

2004년에 있었던 미국 대선 TV토론에서 한 후보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이 어떤 문제에 대한 관점을 늘 바꿀 수는 있으나 문제를 보는 원칙을 자주 바꿔서는 안 된다. 만약 원칙이 늘 바뀌는 사람이라면 그는 결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 말에는 의미심장한 내포가 담겨있다.

끊임없이 원칙을 바꾸는데 있어서, 공산당은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중국 공산당을 예로 들면, 당 창립 80년 동안 16차례의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놀랍게도 당장(黨章)을 16차례나 수정하였다. 아울러 정권을 탈취한 후 50년 동안 중국 헌법을 크게 5차례나 수정하였다.

공산당의 이상은 사회적인 평등이며 결국 공산주의를 실현하는데 있다. 그러나 오늘날, 공산당이 통치하는 중국은 이미 전 세계에서 빈부격차가 가장 심각한 나라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원들은 8억 인구의 가난을 기반으로 큰 부를 누리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사상은 최초의 마르크스주의로 부터 마오쩌둥사상을 합쳤으며 거기에 또 덩샤오핑 이론을 더했고 최후에는 또 장쩌민의 3개 대표이론까지 합하였다. 그 중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사상, 덩샤오핑 이론과 장쩌민의 3개 대표론은 모두 전혀 다른 이론으로 서로간에 차이가 아주 크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이들을 함께 나열하여 숭배하고 있는데 정말 역사적으로 기이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원래 공산당에게는 조국(祖國)이란 것이 존재한 적이 없으며, 전 세계적인 대동단결을 주장하는데 오늘날 중국 공산당은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원래 공산당은 모든 사유재산을 박탈하고 일체 착취계급을 타도할 것을 주장하는데, 오늘날 중국 공산당은 도리어 자본가들을 끌어들여 공산당에 입당하게 하는 등, 그들의 기본 원칙은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공산당 정권이 출현하고 유지해 온 역사를 보면 어제 견지했던 원칙을 오늘 포기하고, 내일이면 다시 바뀌는 사건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바뀌더라도 공산당의 목표는 명확한데, 그것은 바로 정권을 탈취하고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며 또한 사회 권력을 절대적으로 독점하여 행사하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에게는 역사적으로 십여 차례의 이른바 ‘생사를 건’ 노선투쟁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그들이 입장과 원칙을 바꿀 때 발생한 내부의 혼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매번 입장과 원칙을 바꿀 때마다 중국 공산당의 합법성과 생존에 피할 수 없는 위기가 도래했다는 점이다. 국공(國共)합작, 친미외교, 개혁개방, 민족주의의 추진 등이 모두 이러하였다. 그러나 매 차례의 타협은 모두 권력의 탈취나 혹은 권력을 고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매 번 탄압을 하고 나중에 명예를 회복『平反』시키기를 반복한 일 역시 이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서양에 이런 속담이 있다. “진리는 견지할 수 있지만 거짓은 영원히 변화한다(Truths are sustainable and liesmutable.)” 이 말은 너무나도 맞는 말이다.


당성(黨性)으로 인성(人性)을 대신하고 인성을 소멸

중국 공산당은 레닌 식의 정당이다. 중국 공산당이 당을 건립한 초기에 당을 건설하는 3대 노선 즉 정치노선, 사상노선과 조직노선을 확립하였다. 이 3대 노선을 알기 쉽게 풀이한다면, 사상노선은 공산당의 철학적 기초이며, 정치노선은 공산당의 목표를 확립한 것으로 나중에 엄격한 조직형식으로 이 목표를 실현한다.

공산당원과 공산주의 사회의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조직노선의 전체 내용이다.

중국에서, 사람들은 공산당원들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이중인격의 특징을 잘 알고 있다. 사적인 장소에서 공산당원들은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혹은 남편으로서 혹은 친구로서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끼며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성(人性)을 능가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공산당이 가장 강조하는 당성(黨性)이다. 당성은 공산당의 요구에 따른다면, 언제까지나 보편적인 인성을 초월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그들은 인성은 상대적이고 변하는 것이지만 당성은 절대적이고 의심할 바 없으며 도전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중국인들은 부자(父子)지간에 서로를 죽이고, 부부 사이에도 서로 투쟁했다. 모녀 사이에 서로 고발하고, 사제지간에도 얼굴을 붉히기가 예사였는데, 이는 당성이 일으킨 작용이었다. 초기에 중국 공산당 고위관리의 가족들은 계급의 적으로 분류되어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가족들을 구해내지 못했는데 이런 사례가 무척 많다. 이 역시 당성이 일으킨 작용이었다.

이러한 당성은 공산당 조직이 장기간의 훈련을 통하여 얻은 결과이다. 이러한 훈련은 유아원부터 시작된다. 유아원 교육에서 공산당이 아이들에게 주는 표준답안은 비록 아이들의 인성에는 부합되지 않지만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는 기준이 된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에 이르기까지 정치교육에서 학생들은 반드시 당에서 제시한 표준답안에 따라야 한다고 배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급학교에 진학하거나 졸업을 할 수 없었다.

당원들은 평소에 어떠한 의견을 말해도 좋지만 일단 당원의 신분으로 태도를 표명할 때에는 반드시 ‘조직’의 의견과 일치해야 한다. 아래에서부터 위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집단으로 구성된 피라미드의 최정상과 의견이 통일되어야 하는 것이 공산당 정권의 가장 중요한 구조적 특징인데, 한마디로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중국 공산당은 더 이상 공산주의라는 목표를 추구하지 않으며 이미 자신의 이익만 수호하는 정치집단으로 탈바꿈했다. 그럼에도 공산당 조직의 원칙은 변하지 않았으며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당성의 요구도 변하지 않았다. 이 당은 인류와 인성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며, 당 조직 혹은 당 지도자에게 위협이 되는 사람이라면, 일반 백성이건 당의 고위 관리이건 상관없이 즉시 제거해 버린다.


반자연적이며 반인성적인 사악한 영(靈)
천지만물은 모두 생성하고 쇠망(衰亡)하는 생명과정이 있다.

공산당 정권과는 달리 다른 모든 사회에는 그 사회가 비록 아무리 전제적이고 독재정치를 하더라도 모두 일부 자발적인 조직과 자주적인 성분이 존재한다. 중국 고대사회도 사실 이원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농촌에는 종족(宗族)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인 조직이 있었으며, 도시에는 같은 업종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인 조직이 있었고, 정부기구는 현(縣)급 이상만 관리했을 뿐이다.

근대에 이르러 공산당을 제외하고 가장 심한 독재정치를 한 독일의 나치정권도 여전히 사유재산권과 사유재산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공산당 정권은 이러한 자발적인 조직과 자주적인 성분을 철저하게 제거했으며, 위에서 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중앙집권적인 구조로 대체하였다.

만약 이전의 사회 형태를 아래서부터 위에 이르기까지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성장한 사회형태라고 한다면, 공산당 정권은 일종의 반자연적인 사회형태이다.

공산당에게는 보편적인 인성의 표준이 없다. 선과 악, 법률과 원칙은 멋대로 바꿀 수 있는 표준이다. 살인을 해선 안 되지만 그러나 공산당이 적(敵)으로 분류한 사람은 제외한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지만 그러나 계급의 적으로 분류된 부모는 제외한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지켜야 하지만 그러나 당이 원하지 않을 때는 제외한다. 때문에 보편적인 인성을 철저히 부정하는 공산당은 또한 반인성적이다.

공산주의를 제외한 다른 사회에서는 대부분 우선 인성에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승인하고 그 다음 고정적인 계약을 정하여 사회의 평형을 유지한다. 그러나 공산당 사회에서는 인성을 승인하지 않는다. 인성 중의 선(善)을 승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惡)도 승인하지 않는다. 공산당은 이러한 인성의 선악 관념을 배제하고, 오로지 마르크스의 말대로 낡은 사회의 상부구조를 철저하게 뒤엎을 뿐이었다.

공산당은 신(神)을 믿지 않으며 자연만물도 존중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며 사람과 싸우니 그 즐거움은 끝이 없다.”라고 말한다.

중국 사람들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중시한다. 노자(老子)의 말에 따른다면,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즉, 사람과 자연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연속적인 우주 상태인 것이다.

공산당도 일종의 생명이다. 그러나 그는 반자연적이고 하늘, 땅 그리고 사람의 보편적인 도리에 어긋나는 반우주적인 사악한 생령(生靈)이다.


사악한 영(靈)의 특징

공산당 조직 자체는 결코 생산과 발명, 창조에 종사하지 않지만 일단 정권을 획득하면 바로 국가와 인민의 몸에 붙어 인민을 조종하고 통제하는데, 사회의 최소 단위까지 통제하여 권력을 잃지 않도록 보호한다. 동시에 사회의 생산수단을 독점하여 사회적 부를 다 뽑아간다.

중국에서, 공산당 조직은 없는 곳이 없으며 관여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태껏 중국 공산당 조직의 재정 예산을 보지 못했으며, 다만 국가 예산과 지방 정부의 예산이 있고 기업 예산이 있을 뿐이다. 중앙정부에서부터 줄곧 농촌의 촌위원회에 이르기까지 행정 관원은 영원히 당의 관원보다 낮고, 정부는 자신과 동급(同級) 당 조직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당의 비용 지출은 모두 행정 부서의 비용 중에서 지출하되 단독으로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이 당조직은 마치 거대한 사악한 영(靈)의 부체처럼, 중국사회의 모든 세포에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정교하고 세밀한 흡혈관(吸血管)을 통해, 사회의 모든 모세 혈관과 세포 속에까지 깊숙이 들어가 사회를 통제하며 조종하고 있다.

이런 괴상한 부체(附體) 구조는, 인류 역사상 때때로 사회의 일부에서 나타난 적이 있으며 때로 사회 전체에서 잠시 나타난 적도 있다. 하지만 공산당 사회처럼 이렇게 철저하고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지속된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러므로 중국 농민은 이렇듯 가난하고 많은 고생을 겪어야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전통적인 국가 관원들을 부양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 행정관원과 똑같거나 심지어는 그 수가 더 많은 부체 관원들을 부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 노동자들이 그처럼 대규모로 실직하는 이유도 없는 곳이 없는 그런 흡혈관이 몇 년 동안 줄곧 기업의 자금을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의 지식인들은 자유가 너무나도 얻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행정부서 이외에도 하는 일 없이 모든 곳에 존재하면서 전문적으로 그들을 감시하는 그림자가 있기 때문이다.

부체(附體)는, 부체 당한 자의 정신을 절대적으로 통제해야만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에너지를 획득할 수 있다.

현대 정치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사회 권력에 세 가지 내원(來源)이 있다고 한다. 즉 폭력과 재물, 그리고 지식이다. 공산당은 폭력을 독점하고 제멋대로 사용하여 인민의 재산을 박탈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언론과 매스컴의 자유를 박탈하고 인민의 정신적인 자유와 의지를 박탈하여 사회 권력을 독점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였다. 이로 볼 때 중국 공산당이란 이 부체의 사회에 대한 엄밀한 통제는 동서고금을 통해 능가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을 반성하고 중공 부체를 제거하자

마르크스는 1848년에 발표한 공산당의 첫 번째 강령 『공산당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하나의 유령,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에서 빈둥거리고 있다.” 백년 후, 공산주의는 단지 유령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실물(實物)과 실상(實相)을 구비하게 된다. 이 유령은 지난 100년 동안 마치 전염병처럼 전 세계적으로 범람하여, 몇 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숱한 사람들의 재산을 박탈하였고 심지어 본래 자유로웠던 그들의 정신과 영혼마저 박탈하였다.

공산당의 최초 원칙은 모든 사유재산을 박탈하고, 나아가서 모든 ‘착취 계급’을 소멸한다는 것이었다. 개인의 사유재산은 민중들의 모든 사회권리의 기초이며, 민족문화를 전달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사유재산을 박탈당한 인민들은 역시 필연적으로 정신과 의지의 자유를 박탈당함으로써 최후에는 사회적,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는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중국 공산당은 자신의 생존위기 때문에, 1980년대부터 경제개혁을 시작하여 인민들의 재산권 중 일부분을 돌려주었으며, 또한 공산당 정권이란 이 방대하고도 정밀한 통제 기계에 최초로 구멍을 만들었다. 오늘날 이 구멍은 점점 더 커져서 전체 공산당원들이 미친 듯이 재물을 끌어 모으는 상태까지 발전하였다.

폭력과 거짓말로 끊임없이 자신의 외모를 바꾸는 이 부체(附體)한 사악한 영(靈)은 최근 몇 년 동안 실패한 모습이 모두 드러났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말처럼, 이미 하찮은 일에도 겁을 집어먹고 크게 놀라는 정도가 되었다. 그것은 더욱 미친 듯이 재물을 모으고 권력을 통제하여 스스로를 구원하려 하지만 이것은 위기가 도래하는 것을 더욱 재촉할뿐이다.

현재 중국은, 겉으로는 아주 번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에 쌓인 위기는 이미 전대미문의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중공의 습관으로 볼 때, 어쩌면 또다시 과거의 수단을 사용할지도 모른다. 이 수단이란, 다시 한 번 타협을 통해 6.4 사건의 당사자들 혹은 파룬궁(法輪功) 등의 명예를 회복해 주는 것을 말하는데 한편으로는 또 다른 ‘소수’의 적을 만들어 중공이 계속 폭력테러를 자행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중화 민족이 일백여 년 간 직면한 도전 중에서, 각종 기구를 도입하거나 제도를 개량하는 데서부터 최후에 극단적인 격렬한 혁명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대가를 치렀으며 대부분의 민족문명 전통을 상실하였다. 현재 이미 증명된 것처럼 이것은 완전히 실패한 반응이었다. 전체 국민이 증오하고 분노하는 중에 사악한 영(靈)이 틈을 타고 들어와, 결국 세상에서 가장 오랜 문명을 지닌 중국 민족을 통제하였다.

미래의 위기 속에서, 중국인들은 다시 한 번 불가피한 선택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하던지 간에 중국인들은 현존하는 이 사악한 영의 부체에 대해 품은 환상이 모두 중화민족에 대한 재난을 더 크게 하는 것이자 몸에 붙은 사악한 생명에게 에너지를 주는 것임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오직 공산당에 대한 모든 환상을 버리고 자신을 철저히 반성하며, 증오와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이 중국을 좌우지하는 것을 단호히 배척해야만, 반세기동안 중국사회를 통제해온 공산당 부체의 악몽 속에서 철저히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자유 민족의 몸으로 인성을 존중하고 보편적인 관심과 사랑을 기초로 하는 중화문명을 다시 건립할 수 있을 것이다.



【9평 중 다섯째】장쩌민과 중공(中共)이 서로 이용하여 파룬궁 박해


들어가는 말

장푸전(張付珍)은, 약 38세의 여자로 원래 산둥성(山東省) 핑두시(平度市) 센허(現河) 공원 직원이었다. 그녀는 2000년 11월 파룬궁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베이징에 갔다가 납치당했다. 내막을 아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공안(公安)은 강제로 장푸전의 옷을 벗기고 머리를 밀었으며, 그녀를 학대하고 모욕하였다. 「大」자 형으로 침대에 묶어놓은 후, 대소변을 몽땅 침대에서 보게 하였다. 그런 후, 공안은 강제로 이름 모를 독약주사를 놓았다. 주사를 맞은 후, 장푸전은 극도의 고통을 느꼈으며 마치 미친 사람과 같았고 고통스럽게 발버둥치다가 세상을 떠났다. ‘610’직원들이 모든 과정을 현장에서 참관하였다(명혜망 2004년 5월 31일).

양리룽(楊麗榮)은, 34세의 여자로 허베이성(河北省) 바오딩(保定) 지역 딩저우시(定州市) 베이먼가(北門街) 사람이다.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경찰은 늘 그녀의 가족들을 괴롭히고 협박하였다. 2002년 2월 8일 밤, 경찰이 떠나간 후, 계량국(計量局) 운전수였던 남편은 해고될까 두렵기도 하고 경찰의 위협을 감당할 수 없어서 이튿날 새벽, 집에 부모님이 안 계신 사이에, 아내의 목을 졸랐다. 양리룽은 이렇게 10살 난 아들을 남겨두고 처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남편은 경찰에 자수했다. 경찰은 현장에 도착한 후, 아직도 체온이 남아있는 양리룽을 해부하고는 많은 장기들을 가져갔다. 내장을 꺼낼 때 아직도 뜨거운 기운이 남아 있었으며 선혈이 줄줄 흘러내렸다. 바오딩시 공안국의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이게 어디 죽은 사람을 해부하는 것인가, 원래 산 사람을 해부한 것이었구나!”(명혜망 2004년 9월 22일)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완자(萬家) 노동교양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임신 6~7개월 된 한 임신부가 두 손이 강제로 대들보에 묶인 채, 온 몸이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대들보는 땅에서 3미터 정도 높이에 있었는데, 굵은 밧줄의 한 끝은 대들보의 도르래에 있었고, 다른 한쪽 끝은 악경(惡警)의 손에 있었다. 악경이 손을 잡아당기면 매달린 사람은 허공에 둥둥 떴고, 손을 놓으면 급속히 아래로 떨어졌다. 이 임신부는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시달리다가 결국 유산하였다. 더욱 잔인한 것은, 그녀의 남편더러 옆에서 아내가 고문당하는 장면을 보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명혜망 2004년 11월 15일 완자 노동교양소에서 100일이 넘도록 고문을 당한 왕위즈(王玉志)여사와의 인터뷰)

보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이런 참혹한 사건들이 지금 중국에서 박해받는 파룬궁 수련생들의 신변에서 발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더욱 놀라운 사실은 5년이 넘게 지속된 박해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참혹한 사건들에 비하면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공산당은 국제 사회에서 정면(正面)적이며 문명화된 형상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파룬궁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비이성적 박해는 그 광범위함, 심각성, 잔인한 수단 때문에 국제사회에 다시 한번 중국 공산당의 진실한 일면을 폭로하였으며, 중공 최대의 인권 문제로 부각되었다. 사람들은 이 모든 책임이 중국 경찰의 자질이 낮기 때문이라며 책임을 미루는데 습관이 되어 중국 공산당은 좋아지고 있으며 진보하고 있다고 잘못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이고도 체계적인 파룬궁에 대한 잔혹한 박해는, 사람들의 환상을 철저히 깨뜨려버렸다. 많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황당한 박해가 중국에서 발생할 수 있었는지 사고하기 시작하였다. 20년 전에 문화대혁명의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아 정상(正常)을 회복’한지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오늘 또 다시 사악한 역사의 순환에 빠져 들어갔는가? ‘진선인(眞善忍)’을 원칙으로 하는 파룬궁은 세계 60여 개 국가에서 널리 전해지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오직 중국에서만 박해를 받고 있는가? 이 박해 속에서 장쩌민과 중국 공산당은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

장쩌민은 무덕(無德)하고 무능(無能)하다. 만약 중국 공산당이라는 정교하고 정확하며 전문적으로 살인과 거짓을 일삼는 폭력기계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는 절대로 전(全) 중국, 심지어 해외에까지 파급된 집단학살을 발동할 능력이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중국 공산당에 장쩌민과 같은 고집불통의 사악한 독재자가 없었다면, 중국 공산당은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장쩌민과 공산당이라는 사악한 영(靈)이 서로 호응하고 공명하여, 마치 눈 덮인 산에서 등반객의 목소리와 적설(積雪)이 공진(共振)하여 눈사태라는 재난(災難)이 발생하는 것처럼, 장쩌민과 중국 공산당은 서로를 이용하여 역사상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한 탄압을 확대시켜 나갔다.


유사한 과거사, 동일한 위기감

장쩌민은 1926년에 태어났다. 중국 공산당이 줄곧 인민들에게 피비린내 나는 과거사『發家史』를 속인 것처럼, 장쩌민도 줄곧 중국 공산당과 인민들에게 자신의 매국노『漢奸』 역사를 은폐하였다.

장쩌민이 17세 되던 해, 세계 반(反)파쇼 전쟁은 이미 불같이 타올랐다. 애국청년들이 잇달아 전선으로 달려 나가 항일구국운동에 참여할 때, 장쩌민은 도리어 왕징웨이(汪精韋) 괴뢰정부가 1942년 난징(南京)에 설립한 중앙(中央) 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여러 방면의 조사에 의하면, 이런 것들은 일본이 장쑤(江蘇)를 점령했을 때, 장쩌민의 생부(生父)인 장스쥔(江士俊)이 일본군의 반중(反中) 선전기구 고위관리로서 진정한 매국노였던 것과 관계가 있다.

나라를 팔아먹고 일본의 노예가 되었다는 점에서, 장쩌민과 중국 공산당은 동일한 전철을 밟았다. 그들은 중국 인민에 대한 애정이 부족하여 아무런 거리낌없이 중국 인민을 도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장쩌민은 출세를 위하여 중국 공산당에 섞여 들어갔다. 나중에 숙부인 장상칭(江上靑)이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토비(土匪)들이 난사한 총에 맞아 숨지자, 이 관계를 이용하여 자신은 일찍이 숙부에게 양자로 보내졌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리하여 몇 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처장(處長)급 간부에서 전자공업부 부부장(副部長)으로 승진하였다.

알다시피 장쩌민의 승진은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이용해 권세에 빌붙은 것이다. 장쩌민이 상하이시(上海市) 위원회 공산당 서기로 있던 기간에, 매년 상하이에 와서 구정을 보내던 리센녠(李先念), 천윈(陣雲) 등 공산당 원로들에게 아첨하는 장기를 보여주었다. 일찍이 리센녠에게 생일 축하떡을 보내기 위하여,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라는 신분으로, 대설(大雪)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 동안 밖에 서서 리센녠을 공손히 기다린 적도 있었다.

1989년의 ‘6.4’ 천안문 학살사건『屠城』은 장쩌민의 생애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는 바른 목소리를 내던『세계경제도보(世界經濟導報)』를 폭력으로 탄압하고, 중국 인민들에게 신망이 높던 인민대(人民大) 위원장 완리(萬里)를 연금(軟禁)시켰으며 ‘6•4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여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되었다. 학살 직전, 장쩌민은 덩샤오핑(鄧小平)에게 비밀편지를 보내, ‘과감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면서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도 망하고 나라도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89년 정권을 잡은 이후 15년 동안, 장은 ‘안정이 일체를 압도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의견을 가진 일체 인사와 독립적인 신앙단체들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과 학살을 자행하였다.

중국과 러시아 쌍방은 1991년부터 국경을 확정짓기 시작했는데, 장쩌민은 제정(帝政) 러시아와 구(舊) 소련의 중국에 대한 침략을 전면적으로 승인하였다. 즉, 『아이훈조약(愛琿條約)』에서부터 시작된 모든 중국과 러시아 간의 불평등 조약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팔아먹은 중국 영토는 백여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여기서 장쩌민의 경력을 간략히 정리해 보면,

1) 매국노의 장자(長子)로 태어나 열사(烈士)의 고아를 사칭하여 공산당의 ‘속일 편(偏)’자 비결을 직접 실천하였다.
2) 6.4 학살을 지지하고 민주화 운동 인사와 신앙인들을 탄압하여, 공산당의 ‘죽일 살(殺)’자 비결을 직접 실천하였다.
3) 중국 공산당이 일찍이 코민테른 극동지부로서 곳곳에서 소련의 명령을 들은 것처럼, 장쩌민도 무상으로 러시아에 국토를 헌납하여 공산당의 ‘팔 매(賣)’자 비결을 직접 실천하였다.

이와 같이 장쩌민과 중국 공산당은 모두 부끄러운 과거사가 있었기에, 양자 모두 필연적으로 권력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장쩌민과 중공이 ‘진선인(眞善忍)’을 두려워함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역사는 1억이 넘는 사람들의 피로 씌어졌다. 거의 모든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모두 스탈린식의 숙청이 있었다. 무고한 사람들을 함부로 죽였는데 걸핏하면 백만, 천만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에서 급격한 변화가 발생한 후, 공산진영은 하룻밤 사이에 강산의 절반을 잃어버렸다. 중공이 여기에서 얻은 교훈은 탄압을 정지하고 언론자유를 인정하면 공산당은 저절로 멸망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언론을 풀어놓으면, 피비린내 나는 폭행을 어떻게 덮어 감추겠는가? 의식 방면의 속임수는 어떻게 둘러댈 것인가? 만약 탄압을 멈추게 되면, 인민은 공포와 위협이 사라지게 되어, 감히 공산당 이외의 생활방식과 신앙을 선택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공산당이 의지하고 존재하는 사회기초는 어떻게 되겠는가?

중공이 아무리 변해도 그 본질을 바꾸지는 못한다. 때문에 민중에 대한 속임수를 끝까지 유지해야 했으며, 인민에 대한 탄압도 끝까지 지속해야만 했다. ‘6.4’ 이후 ‘일체 불안정 요소를 맹아(萌芽)상태에서 소멸시키자’는 구호가 나오게 된 것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장쩌민이 얻어낸 결론이었다.

바로 이때, 중국에서는 파룬궁(法輪功)이 나타났다. 비록 초기에 파룬궁은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하는데 특별한 효과가 있는 기공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사람들은 점차 파룬궁의 핵심이 간편하고 배우기 쉬운 5가지 공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선인(眞善忍)’을 지도사상으로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될 것을 가르치는데 있음을 주목하게 되었다.


(1) 파룬궁의 ‘진(眞), 선(善), 인(忍)’과 공산당의 ‘거짓(假), 사악(惡), 투쟁(鬪)’

파룬궁은 ‘진(眞)’을 제창한다. 이는 참된 말을 하고, 진실한 일을 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줄곧 거짓말과 세뇌에 의지해 왔다. 만약 사람마다 모두 참된 말을 하게 되면, 민중들은 중국 공산당이 원래 소련에 의지하여 살인, 납치, 도주, 아편재배, 거짓 항일투쟁 등에 의해 일어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큰일을 해내지 못한다.’고 여기는 공산당은 정권을 수립한 이후에도 여러 차례 운동에서 수많은 피의 빚『血債』을 졌다. 그러므로 파룬궁이 ‘진(眞)’을 제창하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야말로 종말이 임박한 것이다.

파룬궁은 ‘선(善)’을 제창한다. 이는 매사에 항상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언제나 선하게 사람을 대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공산당은 줄곧 ‘잔혹한 투쟁과 무정(無情)한 타격’을 제창해 왔다. 중국 공산당의 모범영웅 레이펑(雷鋒)은 “적에 대해서는 엄동설한처럼 냉혹하고 무정하게 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사실 중국 공산당은 적에게만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자기편 사람들도 잘 대해 주지 않았다. 중공의 개국(開國)원로, 원수, 국가주석을 포함하여 모두 인정사정없는 비판을 받았고, 악독하게 구타당했으며,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공산당의 ‘계급의 적’에 대한 도살은 더욱더 사람을 몸서리치게 한다. 이런 사회에서 만약 ‘선(善)’이 우세를 보이게 되면, ‘악(惡)’을 기초로 하는 폭정과 군중운동은 나타날 방법이 없을 것이다.

『공산당선언』에서는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고 했다. 이것은 공산당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대표한 것이다. 파룬궁은 모순이 나타났을 때 안으로 자신의 잘못을 찾으라고 하는데, 이런 세계관은 안으로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밖을 향해 투쟁하는 중국 공산당의 철학과는 뚜렷이 대립된다.

투쟁은 확실히 공산당이 정권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주요한 수단이다. 주기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정치운동을 발동하는 것은, 바로 자기를 끊임없이 충전시키고, ‘혁명투지를 흘러넘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폭력과 거짓말을 끊임없이 강화하며 익숙하게 하는 이런 과정은, 바로 사람들에게 새로운 공포감을 주는 동시에 통치를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사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공산당이 생존을 의지하는 ‘철학’과 파룬궁의 가르침은 뚜렷이 대립된다.


(2)믿음은 두려움을 없애지만 중공은 공포로 정권을 유지

진리를 인식하고 장악한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기독교는 거의 3백년에 가까운 박해를 거쳤다. 로마황제는 무수한 기독교도들의 머리를 자르고, 불에 태워 죽이고, 물에 빠뜨려 죽이고, 심지어 직접 사자우리의 먹이로 던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기독교 신도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역사상 불교가 법난(法難)을 겪을 때도, 모두 이와 유사하게 굳건한 표현이 있었다.

무신론을 선전하는 중요한 목적의 하나는 바로 사람들에게 천국과 지옥이 없으며, 선악에 보응이 없다는 것을 믿게 함으로써, 양심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며, 방향을 돌려 현실의 영화(榮華)와 향락(享樂)을 중시하도록 만드는데 있다. 이때 인성(人性) 중의 약점에 대해 능히 조작할 수 있으며, 협박과 재물에 의한 유혹도 충분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인은 생사를 꿰뚫어 볼 수 있으며 속세를 간파할 수 있으므로, 이때 속세의 유혹과 생명의 위협은 깃털처럼 가벼워져서 공산당이 사람을 통제할 힘을 잃게 만든다.


(3)파룬궁의 높은 도덕 표준을 중공은 감당하지 못한다

1989년 ‘6.4’이후, 중국 공산당의 의식형태는 철저히 무너지게 되었다. 특히 1991년 8월 소련공산당이 와해된 것과 잇따른 동유럽의 극적인 변화는, 중국 공산당에 극도의 공포와 압력을 가져다주었으며,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형세는 그 통치의 합법성과 생존은 전례없는 도전을 받았다. 이때 중공은 이미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주의의 원래 교지(敎旨)로는 당원들을 바로 잡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전면적인 부패를 통해 당원들의 충성심을 얻는 데로 방향을 바꾸었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당을 따라가기만 하면 당은 탐오(貪汚) 등의 방식을 통해, 당원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이익을 얻을 수 있게 허용하였다. 특히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南巡)이후에, 중국은 관청 브로커에서부터 부동산과 주식에 이르기까지 투기가 횡행하였고, 첩을 얻는 데로부터 시작하여 도처에서 밀수를 하거나 음란물, 도박, 마약이 사회에 만연하였다. 비록 공산당 내부에 좋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민간에서는 중공의 부패척결에 대해 일찌감치 믿음을 버렸으며, 중간 및 고급간부의 부패비율이 절반이상을 차지한다고 여기고 있다.

이때 파룬궁 수련생들이 ‘진선인’을 수련하면서 펼쳐 보인 도덕적인 풍모는 민중들에게 남아있던 내면의 선량함을 움직였으며 숱한 민중들이 존경하고 수련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파룬궁이라는 이 거울은 중국 공산당의 바르지 못한 일체 요소를 비추어 냈던 것이다.


(4)중공의 질투를 자아낸 파룬궁의 발전방식과 관리방식

파룬궁의 발전방식은 사람이 사람에게 전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 것으로, 사용한 관리방식은 오고가는 것이 자유롭고 느슨했다. 이는 중국 공산당의 엄밀한 조직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한편, 중국 공산당이 매주 한 차례 혹은 여러 차례 여는 정치학습과 조직생활은 유명무실하였다. 공산당의 의식형태에 대한 당원들의 동질감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지만, 파룬궁 수련자들은 자각적으로 ‘진선인’을 실천하였다. 동시에 파룬궁의 심신건강 개선효과는, 수련인 숫자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도록 했으며, 수련자들은 자발적으로 리훙즈(李洪志) 선생의 저작을 학습하였고, 자비(自費)를 들여 법을 널리 전했다. 이리하여 불과 7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파룬궁은 수련자가 1억으로 늘어났다. 당시, 중국의 거의 모든 공원에서는 아침마다 파룬궁 연공음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공산당은 파룬궁이 중국 공산당과 군중을 놓고 ‘힘겨루기를 하는’ 종교라고 여겼으나, 사실 파룬궁이 사람들에게 가져다 준 것은 일종의 문화이며, 중국 사람들이 오래전에 잃어버린 조상들의 문화와 전통의 뿌리였다. 장쩌민과 공산당이 파룬궁을 이렇게 무서워하는 이유는, 전통적인 도덕이 일단 군중과 하나로 융합되는 날이면, 어떠한 힘도 그 신속한 확장추세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중국 백성들의 이런 타고난 전통을, 몇 십 년 동안 억지로 단절시키거나 왜곡시켜 왔다. 다시 전통을 만회하려는 자체는 바로 역사의 선택이자, 광대한 군중들이 고난을 겪은 후 스스로 선택한 회귀였다. 이런 선택의 필연적인 결과는 바로 시비를 똑똑히 가리고 사악을 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공산당이 주입한 일체의 것들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과 버림이었다. 이것은 중국 공산당의 사혈(死穴)을 찍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특히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의 수가 중국 공산당 당원수를 초과했을 때, 중공의 공포와 질투는 생각만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동시에, 중국 공산당은 사회를 철저히 통제해왔다. 농촌에는 마을마다 공산당 지부가 있고, 도시에는 당지부가 거리의 일반사무실까지 깊이 들어와 있으며, 군대 및 정부와 기업의 말단 부문에 까지 모두 당조직이 스며들어있다. 이런 절대적인 독점성과 배타성은 중공이 정권을 유지하는 중요수단인데, 『헌법』에서는 ‘당의 영도를 견지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파룬궁 수련자는 분명하게 공산당의 영도보다는 ‘진선인’을 표준으로 할 것을 원했다.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당의 영도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5)파룬궁의 ‘유신론’을 공산당 집권의 합법성에 대한 위험으로 간주

진정한 유신론(有神論) 신앙은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 볼 때 중대한 도전임에 틀림없다.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합법성의 내원은 바로 이른바 ‘역사적 유물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 천국(유토피아)’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선봉대’인 ‘공산당’의 영도(領導)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동시에 ‘무신론(無神論)’은 도덕과 선악을 공산당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게 했으며, 근본적으로 진정한 도덕과 선악을 말하지 않았다. 민중들은 오직 공산당이 영원히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정확하다(偉光正)’는 것만 기억하면 되었다.
그러나 유신론은 민중들에게 변하지 않는 선악의 표준을 알려주었으며, 파룬궁 수련자를 놓고 말할 때,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은 ‘진선인’으로 가늠한다. 이것은 중공의 일관적인 ‘통일사상’에 분명한 장애가 되었다.

만약 총체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려한다면 이 외에도 많은 원인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 논술한 5가지 이유 중 어느 것을 보더라도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하나같이 치명적이다. 사실 장쩌민이 파룬궁을 탄압한 것도 동일한 이유에서 출발한 것이다.

장쩌민은 경력을 속여서 출세했으므로 당연히 ‘진(眞)’을 두려워한다. 또 민중을 탄압하여 집권했으므로 당연히 ‘선(善)’을 싫어하며, 서로 물어뜯고 아귀다툼 하는 당내투쟁으로 권력을 유지해야 했기에, 당연히 참을 ‘인(忍)’자도 듣기 싫어한다.

장쩌민의 좁은 속과 강한 질투심은 작은 일에서도 보아낼 수 있다. 저장성 위야오현(浙江省 余姚縣 현재는 시(市)로 승격됨)에는 ‘허무두 유적지 박물관(河姆渡遺址博物館)’이 있는데, 중국의 중점문물보호단위이다. 당시 ‘허무두 유적지 박물관’의 현판 제사(題詞)는 차오스(喬石)가 쓴 것이었다. 1992년 9월, 장쩌민이 허무두를 참관할 때 차오스가 쓴 제사를 보더니, 얼굴이 무섭고 음침하게 변했다. 수행원들은 아주 긴장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장쩌민이 차오스를 싫어하고, 항상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은 어디를 가든지 제사(題詞)를 썼는데, 심지어 ‘지난(濟南)시 공안국 교통 지대(支隊)’와 ‘정저우(鄭州)시 퇴직 엔지니어 협회’에까지 제사를 썼다. 박물관장은 도량이 좁은 장쩌민을 감히 무시하지 못하고, 1993년 5월, 박물관을 정돈하고 다시 대외에 개방한다는 구실로, 장쩌민이 쓴 글로 제사를 바꾸었다.

마오쩌둥은 ‘웅문4권(雄文四卷)’이라고 불리며, 『덩샤오핑문선』에도 「고양이론(猫論)」이라는 실용주의 사상이 있다. 장쩌민은 기껏 머리를 짜내어 세 마디를 만들었는데, 또는 ‘3강(三講)’이라고도 한다. 책으로 찍어낸 후, 중공 조직계통을 거쳐 널리 보급하였으나, 강제로 주문하도록 해야 겨우 판매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원들은 장쩌민에 대해 조금의 존경심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도처에서 여가수와 섹스 스캔들을 일으키고 해외순방 중에 ‘오 솔레미오’를 부르고 스페인 국왕 앞에서 머리를 빗은 것과 같은 여러 가지 추한 행동을 일삼았다.

그러나 파룬궁을 창시한 리훙즈(李洪志) 선생은, 평민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설법할 때면 여러 분야의 교수, 전문가, 유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많은 박사와 석사들이 만 리(里)도 마다하지 않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설법을 들었다. 리훙즈 선생은 거침없이 유창하게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초고가 필요 없었으며, 설법한 녹음을 종이에 베껴 쓰면, 곧 책으로 출판할 수 있었다. 이는 허영심과 시기심이 많고 속이 좁은 장쩌민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장쩌민의 생활은 극히 방탕하고 부패하여, 9억 위안을 들여 자신의 전용 호화비행기를 사들였고, 걸핏하면 국고에서 몇 백억 위안을 지출하여 아들에게 주고 사업하도록 했으며 사돈, 친척관계를 이용하여 모든 친척과 측근들을 장관급 이상의 고급관리로 선발하고 측근들의 탐오와 범죄를 감싸 주었다. 이와 같이 그는 나쁜 일을 하는데 있어 모든 수단을 다 썼다. 때문에 장쩌민은 파룬궁의 도덕적인 역량을 아주 두려워했다.

장쩌민은 중국 공산당의 최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정치적인 업적과 재능이 부족했기에, 늘 자신이 중국 공산당의 잔혹한 권력투쟁 속에서 쫓겨내려 갈까봐, 그 ‘핵심’ 권위에 대해 아주 민감하였다. 견해가 다른 사람을 없애기 위하여 장쩌민은 음모와 계략을 꾸며 정적(政敵)인 양상쿤(楊尙崑), 양바이빙(楊白冰) 형제를 제거했다. 1997년 중공 15대(大)부터 2002년 16대까지, 장쩌민은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내쫓았으나, 도리어 자신은 관련규정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틀어쥐고 물러나지 않았다.

1989년 ‘6.4’이후, 중국 공산당의 새로운 총서기 장쩌민 등은 언젠가 한 번 국내외 기자들과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 기자가 한 여대생이 6.4 때문에 쓰촨성의 농장에 귀양 가서 벽돌운반 일을 배치받았으며, 현지 농민들에 의해 여러 차례 강간당한 사실을 질문하였다. 장은 “당신의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녀는 폭도입니다. 만약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은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문화대혁명 때 장즈신(張志新)은 중공 감옥에서 윤간당하고 후두(喉頭)를 잘렸다. 이런 사실을 장쩌민은 ‘벌을 받아 마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장쩌민의 불한당과 같은 변태적이고 잔혹한 인격을 볼 수 있다.

개괄적으로 말하자면, 장쩌민의 음침하고 어두운 심리, 독재 권력욕, 잔인하고 포악한 인격과 ‘진선인’에 대한 공포가 장쩌민이 이유 없이 파룬궁을 탄압한 원인이 되었다. 이점은 공산당 조직과 고도로 일치하는 것이다.


장쩌민과 중공의 상호이용

장쩌민은 오로지 파룬궁을 ‘소멸(消滅)’시키는 것으로 개인적인 분노(憤怒)를 발산하려 했다. 그러나 장쩌민이 비록 자신을 치켜세우면서 정치적인 권모술수에 열을 올렸지만, 그의 무능함은 이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중국의 전통문화에 뿌리를 두고서, 광범위한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수련자들을 장쩌민 한 개인으로서는 거의 어찌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 중공이라는 이 폭정(暴政)기계가 이미 연마되고 성숙되어 있었으며, 이것 역시 파룬궁을 없애버리려 하고 있었다. 이것이야 말로 공산당 총서기인 장쩌민에게는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이는 식이었으며, 가볍게 탄압개시 버튼을 누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파룬궁 탄압에서 양자(兩者)의 호응과 공명은, 마치 등산객이 크게 외친 소리에 눈사태가 발생한 효과와 똑같았다.

장쩌민이 탄압명령을 내리기 전에, 파룬궁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감시, 조사와 죄명을 꾸미는 작업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원인은 중국 공산당이라는 이 사악한 영(靈), 사교(邪敎)조직 특유의 사악한 요소가 자신의 존재에 ‘진선인(眞善忍)’이 위협적임을 본능적으로 감지했고, 더욱이 이렇게 방대하고 지속적인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연공인들을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4년부터 중국 공산당의 공안 요원들이 파룬궁 수련생들 속에 잠입해 들어갔으나 어떠한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많은 요원들이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하였다. 1996년『광명(光明)일보』는 기공에 대해 ‘선전도, 간섭도, 탄압도 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3불(三不)’정책을 어기고 문장을 발표하여, 사상영역에서 이유 없이 파룬궁을 비난하였다. 그 후, 공안과 이른바 ‘과학자’의 직함을 가진 정객(政客)들의 파룬궁에 대한 교란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1997년 초, 중국 공산당 중앙 정법위원회 서기 뤄간(羅干)은 직권을 이용하여 공안부에 파룬궁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를 진행시켰는데, 목적은 죄명(罪名)을 꾸며 파룬궁을 없애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각지에서 “아직 어떠한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보고를 받은 후 뤄간은 1998년 7월 또 중국 공안부 1국(정치보위국이라고도 부름)을 통하여 공정(公政)『1998』 제555호『파룬궁 조사개시에 관한 통지』를 발표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우선 파룬궁이 ‘사교(邪敎)’라고 미리 죄명을 정하고 나서, 전국 각지 공안부문에 체계적인 ‘잠입조사’를 지시하고 증거를 수집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사결과 여전히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사악한 영의 조직인 중국 공산당이 이미 손을 쓰려고 했을 때, 이 탄압기계에 시동을 건
작성일:2005-11-21 19:19:10 211.215.23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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